다시, 20년 전 6월
1987년 1월 14일에 박종철이 죽었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었다. 스물한 살이었다. 경찰 당국은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의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 이를 증언했다. 그의 사인은 끔찍하고도 집요한 고문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가 이를 폭로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범이 아니었다. 진상은 조작됐다.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7주년 추모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관계 당국의 진상 조작 사실을 폭로했다. 온 국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5월 27일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발족했고 5월 29일에는 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결성됐다. 박종철의 죽음이 온 국민을 일으켰다. 뜨거운 6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6월 9일 연세대생들이 교문 앞에서 시위중이었다. 경찰이 쏜 직격탄에 한 청년이 맞았다. 의식을 잃은 그의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져내렸다.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었다. 그 모습이 신문 사회면에 실렸다. 다시 또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다음 날 잠실체육관에서는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독재 정권의 권력 승계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6월 18일에는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거리로 나왔고, 6월 26일에는 전국 33개 도시에서 18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어깨를 걸었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전진했다. 6월 29일, 마침내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드디어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됐다. 6월 항쟁의 승리였다. 그리고 7월 3일에 이한열이 사망했다. 시청 앞 광장에서 백만 명이 함께 울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들은 이십대를 갓 넘긴 청년들이었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최근 이뤄진 한 설문 조사에서 서울 지역 4개 대학 대학생의 절반 이상은 '6월 항쟁'을 모른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다가올 대선에서 독재 정권의 역사의식을 잇는 야당 유력 후보에 한 표를 던질 것이다.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박종철과 이한열의 이름을 모르는 채로 이루어진 선택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그것은 정치적 무뇌아 혹은 윤리적 백치의 선택이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잊을 권리가 없다. 박종철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에게 부친은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못돼서 죽었소. 똑똑하면 다 못된 것 아니오?" 이 반어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똑똑하지만 너무 착한 우리들에게도 20년 전의 그 6월이 온다.
(2007.5.26)
- 출처 :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산문, 246-247p |